급작스레 맹장이 터져 복막염까지 진행되었다.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정신이 들고 조금 지나 눈 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한건
냉동실에서 갓꺼내 성에가 낀 클래식병의 코카콜라였다.
레드 와인잔에 담아 톡톡쏘는 탄산 향을 코와 혀로 느끼며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빠 입원 소식에 월요일 휴가를 내고 내려온 큰 딸에게 말했다.
쏭! 서울에 콜라 맛있게 하는 집 찾아봐라. 퇴원하면 가서 신나게 마셔야겠다.
큰 딸은 픽 웃었다. 그런데가 어디 있냐면서.
오랫만에 병실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하다
아빠가 술만 먹으면 주장했던(술주정) "기억은 조작된거"가 생각나게하는 소설이 있다면서 보내 주겠다 한다.
이튿날 교대로 휴가를 내고 내려온 작은 딸 편에 그 책을 받아봤다.
에쿠니 가오리 著 "등 뒤의 기억"이다.
이런 젠장할 "레몬 슬라이스가 동동 떠 있는 콜라" 그것도 두번 씩이나 글 속에 적혀있다. 그리고 눈 앞에서 어른 거린다.
카톡을 보냈다. "이건 무슨 맛일까?"
답장이 왔다. "ㅋㅋㅋ 이부분 보면 아빠가 먹고 싶겠다 생각했었어, 그래서 아..괜히 읽으라고 했나? 생각했어."
어쨋튼 만 4일 그리고도 몇시간이 더 지나 물을 마실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 읽었던 책이다.
이 책에서 나를 각인 시켰던 "레몬 슬라이스가 동동 떠 있는 콜라"라는 문구는
내용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이지만
먼 훗날 새롭게 가공되어 지금과는 또 다른 기억으로 남게 될 지도 모른다.
병실, 복도, 응급실, 수술실 중앙의 원형 전등, 의사, 간호사, 간병인, 소독약냄새, 심전도와 인공호흡기에서 나는 소리,
문병온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맛없는 환자식이 담긴 쟁반, 그것을 운반하는 왜건,
링거스탠드를 다그락 다그락 끌며 걸어가는 환자들의 뒷모습...등 나의 9일동안 병원 소경과 함께.
우리에게 냉정과 열정사이로 잘 알려진 작가 에쿠니가오리의 이 번 작품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소설적 구도가 히가시노 게이고 著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생각나게 했다.
전혀 연결되어 지지 않을 것 같은 구성원들의 얘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맞물려지면서
뭔가 한 방향으로 감이 잡혀가는 구성, 그렇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 까지는 정말 그랬다.
그런데 그게 끝이였다. 불확실한 기억처럼 이 책은 결론이 없다.
뭐지? 볼일을 보긴 봤는데 마지막 처리를 안한 듯한 찝찝함.
독자들이 알아서 뒷처리를 다시 하라는 건지.
속편을 내겠다는 작자의 의도가 깔려 있는 건지.
이 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것 같던 고비토를 본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종족이라는 건지 ..
난 "고비토"가 무슨 뜻인지를 몰라 사전까지 검색해야 했지만.
책의 제목처럼 등 뒤의 기억이라는 모호성만 가득한체로 책장을 덮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기억이라는건 시간이 지난 후 나도 모르게 변질되어 그게 사실인양,
아니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마성이 있다는 거다.
내 의지에 의해
아니면 타인에 의해 강요되어진
빛 바랜 기억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날
2015.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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