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농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직업을 가졌었던 나(작가)는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밭에서 소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한 노인에게 흥미를 느끼고 말을 붙인다.
그리고 햇빛 쏟아지는 오후에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 함께 앉아 그 노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주인공 '푸구이'가 살아왔던 삶을.
사십여 년 전, 이 동네에서는 '나리 마님'이라 불리었고 성안에 가면 사람들 모두가 '선생'이라 불렀던
지체 높으셨던 분, 푸구이의 아버지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버지는 푸구이가 놀음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허름한 초가집으로 이사하던 날
똥을 눟다 똥통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돌아가셨다.
소작인이 달려가 부축해 드렸지만 몇차례 허허 웃으시다가 눈을 감았다.
자기자신과 아들에 대한 회한이 만감에 교차했을거다.
그 역시 놀음으로 많은 재산을 탕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세상 부러울거 없던 도련님, 푸구이의 삶은 고달팠다. 삶이 왜 이리 모질까?
아들, 딸 , 부인 그리고 사위, 마지막엔 외손주까지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부인 자전이야 어쨌튼 병으로 죽었다치자,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황당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게 죽었다.
그 주검들을 눈으로 목격해야 했으니 그 아픔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참 많은 사람을 죽인다.
꼭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사람 많이 죽이기로 소문났던 임성한 작가의 원조쯤 되는 것 같다.
오죽하면 장예모 감독이 연출하고 공리가 푸구이의 부인 자전으로 분했던 영화 '인생 (1994년 작)'에서는
아들 유칭과 딸 펑샤만 죽는걸로 수위를 낮췄을까 말이다.
영화에서는 엔딩 크래딧 마지막 장면이
자전은 몸이 아파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긴 하지만 푸구이와 사위 얼시, 외손주 쿠건 넷이서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행복하게 그려지고 있다.
원작처럼 모든 가족을 죽이는 비참함을 연출하기엔 감독이 너무 여렸는 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P278)
노인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건드리지 않을 돈 십위안을 베게밑에 넣어 뒀는데
마을 사람들 모두 자신의 시체를 거둬줄 사람 몫이라는걸 알고 있다고 했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거야 . 아둥바둥해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중략)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P279)
오입질에 도박에 있는 망나니 짓은 다하면서 사람들 가슴에 대못을 박아 놓던 젊은 시절을 생각한다면
이제와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 사는게 평범하다는 건지?
작가는 서문에서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천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낙천적인 태도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주인공 푸구이는 그 모든 굴곡된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케세라세라'의 관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냥 사는 거다.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는거다.
마지못해 살아 온게 맞다.
인생의 중국어 제목이 '활착(活着)'이다. 살아간다는 의미라 한다.
푸구이는 반문한다. '나는 살아 있지 않느냐고?'
글쎄, 난 그의 비루한 삶의 여정에 대해 무엇 하나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냥 먹먹할 뿐이다.
위화 장편소설 '인생' 표지
2019. 4. 20.
영화 '인생'에서의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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