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드라마 '시지프스' 15회에서는 서길복(김병철 분)이 자살을 시도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창문 틈을 꼼꼼히 테이프로 막아 외부로 부터 단절을 시도한다.
그리곤 토치램프로 냄비 위에 올려 놓은 착화탄에 불을 붙이고,
올가미를 만든 동앗줄에 목을 메는 일련의 행동들이 리얼하다. -저렇게까지 보여줘도 되나 싶었다.-
목까지는 메지 않았지만 착화탄을 피우고 젊은 여자가 자살을 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비해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책,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지음, 김영사-에 나오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중 하나 '분리수거'의 내용이다.
죽은 이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밀실, 착화탄으로 자신을 실수없이 죽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현관문의 좌우와 위 아래 틈 역시 청록색 천면 테이프로 꼼꼼하게 막아 놓았다.
화장실의 배수구와 환풍기를 비롯하여 가스레인지 위의 팬이나 싱크대의 배수구까지,
집안의 모든 구멍을 찾아서 완벽하게 틀어 막았다.
신중하게 단추를 채우듯 밀폐 과정을 하나하나 거치고, 화장실 바닥에 캠핑용 간이 화로를 놓고
착화탄 여러 개를 얹어 불을 피웠으리라. (p23)
화장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착화탄 재를 쓸어 담으며 작가는 의문을 갖는다.
화로 근처에 있어야 할 라이터 같은 점화 장치가 없다. 토치램프나 하다못해 제과점 성냥조차 없이
어떻게 불을 붙였을까? 여느 착화탄 자살 현장에 비하면 화로 주변이 너무 깨끗했기 때문이다.
의문은 현관문 왼 쪽에 놓인 가정용 분리 수거함을 정리하며 풀렸다.
재활용품과 쓰레기를 구분해두기 위해 네 칸으로 나누어진 수거함에 사라진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불을 피우는데 쓴 토치램프와 부탄가스 캔은 철 종류를 모으는 칸에,
화로의 포장지와 택배상자는 납작하게 접힌 채 종이 칸에,
또 부탄가스 캔의 빤간 노즐 마개는 플라스틱 칸에 착실하게 담겨 있었다.(P24)
자살 직전 분리수거? 착화탄에 불을 붙이고 연기가 피어 오르는 상황에서 무슨 심정으로?
자기 죽음 앞에서조차 초연한 공중도덕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건물 청소를 하는 남자가 죽은 자에 대해 넌지시 작가에게 말한다.
서른 살 정도 여자 , 착한 분, 인사성도 바르고 맨날 고맙습니다. 입에 달고 살던 사람,
매년 설날과 추석엔 양말이나 식용유 세트 같은 것을 준비해 주곤 했는데..
그런 사람이 잘 살아야 하는데.
건물 청소를 하는 이가 전하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 착한 여인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
억울함과 비통함이 쌓이고 쌓여도 타인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남에겐 화살 하나 겨누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해 과녁을 되돌려 쏘았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죽일 도구마저 끝내 분리해 버린
그 착하고 바른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겐 돌려주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만은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 바른 마음이 날카로운 바늘이자 강박이되어 그녀를 부단히 찔러온 것은 아닐까(P26)
종량제 봉투는 착화탄에서 벗겨낸 포장지와 병원에서 받았을 수십 장의 약봉투로 채워져 있었다.
앨범과 액자에서 빼냈을 수많은 사진의 모서리가 뾰족한 톱니가 되어 봉투를 뚫고 나갈 듯 날까롭게 찌른다.
그 모든 것이 죽기 전에 스스로 정리한 것이리라, 그녀의 못다한 이야기, 한숨과 절망 가득한 사연이
작은 봉투에 고스란히 담긴 것만 같다. (p26)
다양한 경력의 작가 김완은 현재 특수청소 서비스 회사 '하드 웍스'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특수청소 서비스' ? 생소하다.
하드웍스를 검색해보니 [hardworks: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특수청소서비스]다
서비스 영역이 강력범죄 현장 특수 청소,유품정리.트라우마 클리닝.시신 부패 현장 특수청소,동물사체 처리...등이다.
정말로 hard한 업종이다.
작가의 업무적 경험치와 감성적 상상력의 유추긴 하겠지만
생을 마감한 현장의 흔적들로 부터 고인의 삶에 단편적이나마 접근해 보는 시도들을 에세이 형태로 묶은 책이다.
책 표지는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 오는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이다.
'죽음 언저리에서 행하는 특별한 서비스'를 통해 힘들었을 삶의 흔적을 걷어 낸 공간,
한 생명이 스스로를 멈추어야 했던 그 장소에 하얀 절망이 서려 있는 듯 하다.
죽은 자의 집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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